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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

아는만큼 보이는 부석사 무량수전 답사기

산이슬 2014. 5. 1. 12:24

 

  그전까지 한국의 사찰은 등산하듯 올라가서 전경을 한번 휙 둘러보고 내려오는게 전부였는데

이번 영주 부석사 답사는 큰 맘먹고 오랜시간 건축물 등을 보고 내려왔다.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해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고 더 먼 곳에 있는 것, 더 큰 것, 가장 화려한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생각 하고 있었는데 부석사를 본 후 그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정말 아는만큼 보인다, 아는만큼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는 눈이 생긴다.

자연과 부석사의 조화로운 배치, 그 속의 아름다움을 찾는 여행길이였다.





부석사: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浮石寺] (두산백과)




당간지주: 당(幢 : 불화를 그린 旗)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

[네이버 지식백과] 당간지주 [幢竿支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옆에서 보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쌍둥이 같다.



부석사 삼층석탑






부석사의 법고. 6시에는 법고치는 스님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기다려봤지만 그날은 보지 못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을때 도움을 주었던 선묘낭자. 그 선묘낭자의 일화가 있는 부석.



부석:의상(義相)이 당나라에 가서 공부할 때 양주성에 있는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집주인의 딸 선묘가 의상을 깊이 사모하였다. 의상이 귀국할 때 바다에 몸을 던지며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겠다'고 원을 세웠다. 이후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 돕는다. 대표적인 일화로, 676년 경북 영주에서 절을 짓던 의상이 산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선묘룡이 나타나 번갯불을 일으키고 봉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았다. 이에 놀란 산적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이라 짓고, 봉황이 나타났다 해서 산 이름을 봉황산(鳳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부석사에 조사당에는 선묘의 진영이 있으며, 무량수전 뒤에 선묘각(善妙閣)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묘 [善妙]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안양루에 올라 석등을 본다. 

안양루 에서 소백산맥을 바라보면 그 경치가 아주 멋지게 눈에 들어온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높이에 자연과 조화로운 장소에 위치한 절, 그게 바로 부석사이다.


안양루에서 바라본 소백산맥, 탁 트인 경치는 가슴 속 까지 시원하게 해주고 옹졸한 생각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높이 2.97m. 국보 제17호.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4매로 짠 방형의 지복석(地覆石) 위에 1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네 면에는 각각 2구씩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으며 상면에는 팔각의 하대석(下臺石) 받침 2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모서리를 향하여 한 잎씩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조각되었고 꽃잎 끝은 말려서 귀꽃이 되었다. 특히, 복련 중심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이 있어 연꽃 속에서 간주(竿柱)를 받쳐 올리는 듯이 표현되었다. 간주는 전형적인 팔각주(八角柱)로서 굵기나 높이가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상대석(上臺石)은 통식을 따라 평박(平薄)하나 여기에 조각된 8엽의 앙련(仰蓮)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팔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고 화창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돌려 뚫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앙련 위에 보살입상 1구씩이 조각되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다.

옥개석(屋蓋石)은 낙수면이 우뚝하고 추녀 밑에 약간의 반전(反轉)이 있고, 정상에는 복련이 조각되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 [浮石寺無量壽殿─石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자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오묘한 표정의 보살을 보며, 그 옛날 고대인들은 어떤 표정을 아름답다 했을까 생각해본다.


안양루에 걸린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다는 김삿갓.

지금 나의 이야기다. ㅎㅎ



부석사 전경. 

산과  하늘과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절이다.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다.


부석사 무량수전 안의 아미타여래상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중생들을 보는 불상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부석사(浮石寺)의 본전(本殿)으로서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그후 몇 번의 중창(重創)이 있었고, 조선 광해군(光海君:1608∼1623) 때 단청(丹靑)을 하였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추녀의 네 귀를 8각 활주로 받쳐주고 있다. 전면(前面) 기둥 사이에는 중앙어간(中央御間)과 양협간(兩夾間)에 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고 단간(端間)에는 창문을 달았다. 기둥에는 알맞은 배흘림이 안정감을 주며 간결한 두공(枓栱  )과 우주(隅柱)에 보이는 귀솟음 수법은 건물 전체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자잘한 정자살 분합문 위에 시원스런 포벽(包壁), 그 위에 가늘고 긴 기왓골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불전(佛殿)은 1916년의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76년(고려 우왕 2) 중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수법이나 세부양식이 묵서명 연대의 건물로는 볼 수 없고, 적어도 13세기 초까지 올려볼 수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같은 경내에 있는 조사당(祖師堂)이 1377년(고려 우왕 3)에 건립되었다는 묵서명이 나왔고, 이 건물과 비교할 때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앞섰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두산백과)

기둥 높이의 3분의 1 지점이 제일 굵고 위는 아래보다 더 가늘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기둥에 배흘림을 두는 것은 구조상의 안정과 착시현상(錯視現象)을 교정하기 위한 심미적인 착상에서 나온 수법으로 서양건축의 엔타시스와 같은 것이다. 


배흘림기둥은 그리스의 신전(神殿) 건축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건축에서도 고대에는 흔히 사용하였다. 그러나 배흘림기둥을 꾸준히 사용해 온 것은 한국 건축물이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이미 기둥의 배흘림이 뚜렷이 나타나며 고려시대의 대표적 건물인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 즉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 ·화엄사 대웅전(華嚴寺大雄殿)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배흘림기둥 (두산백과)

 

혜곡 최순우선생의 말처럼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본 부석사 석등, 안양루, 소백산 자락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또 이런 좋은 위치에 건립된 부석사를 보며 아름다움을 보는 고대인들의 지혜를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배우고 좀 더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미는 아는만큼 더 경이롭고 대단하다. 모르고 폄하하는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